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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아버지찾아 삼만리 - 삼국시대_고구려2화

공부다다 2022.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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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_고구려

유리의 아버지찾아 삼만리

유리는 어려서부터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장난치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하루는 참새를 잡겠다며 새총으로 여기저기 마구 쏘아대다가 실수로 그곳을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의 항아리를 깨뜨렸습니다.
이에 화가 난 아주머니가 유리에게 이르길 "아버지없이 자란 것들이 망나니처럼 구네"라며 면박을 주자 유리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슬픈 마음에 눈물을 훔치며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묻게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여 사람이기는 해도 이곳에서 사는 것을 허락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부여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훗날 자신을 찾게 되면 자신과 나눈 칼 조각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온 동네를 이 잡듯이 돌아다녔지만행방을 찾지 못해 크게 실망하던 유리가 집 마루에 걸터앉아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때마침 마루 기둥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기이하게 여기어 들춰보니 그토록 찾고 있던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리는 절친이었던 옥지&구추&도조와 함께 칼조각을 들고 부여를 떠나 졸본성에 도착하여 아버지 주몽을 만나 부러진 칼 조각을 바치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본 주몽이 크게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이후 유리가 태자에 등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주몽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고구려 2대 국왕으로 등극하게되니 이가 바로 유리명왕이었습니다.

기원전 18년 유리는 왕위에 오른 후 비류국왕이었던 송양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나 이듬해 그녀가 사망하자골천인으로 고구려 사람이었던 화희와 중국 전한시대 한족 출신이었던 지희를 새로이 후실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후실은 유리의 마음에 들고자 라이벌의식을 느꼈는지 늘 서로에게 악감정을 품고 음해하기만 바빴는데 유리는 이들이 사고를 칠까 염려해 둘 사이를 떼어다 각자의 궁에서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유리가 사냥을 나가 며칠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이 둘은 서로를 헐뜯으며 또 싸우기 바빴는데 열이 뻗친 화희는 한나라의 천한 비첩 주제에 무례하다며 치희를 모욕을 주니 치희는 그대로 왕궁을 떠나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듣게된 유리가 급하게 돌아와 치희를 봍잡고는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는데 이미 마음이 굳어져 버린 치희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길 원했고 치희가 떠나는 것에 큰 슬픔을 느낀 유리가 시를 하나 지었으니 이 시가 바로 황조가 입니다.

황조가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가 서로 정답게 노는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기원전 9년 선비족은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기 보다는 근방을 약탈하고 말썽만 부리기 일쑤였는데 이때 장군 부분노의 건의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선비족을 토벌 이들을 통합 시키기에 이릅니다. 뒤이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고구려의 지배력을 더욱 넓히고자 했으나 유리가 재위하던 동안 고구려 내부는 완전히 통합되지 않아 많이 시끄러웠습니다.

여기에 선비족을 무력으로 굴복시켰지만 아직 고구려 변방에는 부여 대소왕이 건재했고 국력에서도 크게 밀렸던 고구려는 부여에게 저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는데 대소왕은 고구려 왕자를 인질로 보내도록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도절 태자를 인질로 부여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태자가 이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았던게 화가 났던 부여 대소왕기원전 6년 군사 5만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 하였습니다. 그러나 심한 폭설로 길이 막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뒤 장남 도절 태자가 죽자 유리는 차남 해명을 태자로 임명했으나 기원 후 4년 차남 해명이 태자가 되었음이 선포되자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있던 황룡국 국왕은 해명이 어떠한 사람인지 고구려가 아직 건재한지 여러모로 시험해 볼 요량으로 고구려에 활을 선물로 보냈는데 황룡국의 속셈을 눈치 챈 해명이 고구려를 업신여길까 우려해 사신 앞에서 그 활을 부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활이 약해서라면서 황룡국 국왕을 비꼬자 이 소식을 들은 황룡국 국왕은 매우 자존심이 상했는데 자신의 아들이 무례를 범한 게 못마땅했던 유리가 해명을 직접 황룡국으로 보내 그곳에서 처분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자 해명을 직접 본 황룡국 국왕은 해명의 품채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어 감히 해치지 못하였고 유리는 황룡국에서 해명이 돌아오자 이웃나라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의 안녕을 빌어야 함에도 자신의 힘이 세다는 것만 믿고 날뛰었다며 아들에게 자결하라 명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해명은 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 없다며 스스로 칼을 받아 자결을 하였고 이내 삼남이었던 무휼이 다음 태자의 지위를 이어받았습니다.

12년 중국 대륙의 전한 시대를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가 고구려 영토를 침범해 고구려인들을 강제로 징발하려 하자 신나라와 맞붙는게 부담스러웠던 고구려는 그 지역 사람들을 뽑아 신나라 군대에 합류하도록 강제 차출 시켰습니다.
하지만 신나라 군대에 합류하기 싫었던 고구려인들은 그대로 도망쳐 도적이 되었고 근방을 휩쓸고 다니며 신나라 변방을 어지럽히자 왕망은 직접 군사를 보내 이들을 처리하는 한편 고구려를 공격하여 정벌하도록 명을 내리게 됩니다. 이로인해 고구려와 12년과 14년에 2회 정도 전투를 벌였으나 전투 규모가 각나라의 국운을 걸 정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국지전 정도에서 그쳤지만 오히려 고구려에게 가장 부담이 되었던 전쟁은 13년에 일어난 부여와의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태자 무휼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여군이 진격하는 길목에 매복하여 이들을 무참히 도륙하면서 부여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고 고구려는 또 한 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유리명왕이 재위한지 37년 째인 18년 가장 총애하던 6남 여진이 물에빠져 죽는 일이 발생하자 유리는 크게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했는데 때문에 여진이 죽은 뒤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56세의 나이로 승하하게 됩니다.

그리고 태자였던 무휼이 유리의 뒤를 이어 다음 고구려 국왕으로 등극하게 되니 이가 바로 고구려 3대 국왕 대무신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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