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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장수였던 미천왕 - 삼국시대_고구려7화

공부다다 2022.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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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년 국상 창조리는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마침내 압록강 근방에 숨어 소금장수를 하던 고을불을 추대하니 이가 바로 고구려 15대 국왕 미천왕이 됩니다. 

 미천왕은 신하들이 자신을 찾아내어 왕으로 추대하려 들자 자신은 왕의 재목이 아니니그럴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던 일화가 있으나 훗날 미천왕의 업적은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닦아 둔 최고의 국왕으로서 칭송 받게 됩니다.

 

 미천왕은 사천왕의 차남이었던 고돌고의 아들로서 고구려 왕족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 왕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큰아버지 봉상왕이 왕권을 강화하겠다며 친척과 일가족을 처형하는 등자신의 권력에 해가 될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자신의 아버지마저 처형당하지 화를 면하기 위해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의주의 외딴 마을에 도착해 자신이 왕족인 것을 숨기고 음모라는 부자 집 머슴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평탄치 않았고 음모가 자신의 집에 들여놓은 우물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너무 심하게 난다고 하여 밤에 하루 종일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돌을 던지라고 시키는 등 고단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미천왕은 소금 장수 재모를 만나 같이 소금 장수를 전업하였으며 간신히 끼니는 때울 수 있었으나 여전히 고단하고 팍팍한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매우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창조리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 위해 미천왕을 찾게 했고 그렇게 만나 도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창조리에게 왕위에서 쫓겨난 봉상왕은 자신이 자결하게 만들었던 고돌고의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훗날 크게 욕보일까 우려해 감옥에서 두 아들과 함께 자살하게 됩니다.

 

 302년 진나라의 혼란은 계속해서 이어져갔고 변방을 신경쓸 틈이 없었는데 이에 고구려는 요동 지방으로 계속 진출을 시도해 현도군을 점령하였고 311년 서안평을 점령하여 낙랑군을 고립시켰습니다. 313년 낙랑군을 비롯해 314년은 더 남하해 대방군, 즉 지금의 황해도 부근을 점령함에 따라 평안도 일대의 비옥한 농지를 손에 넣으며 그곳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국력을 엄청나게 상승시킬 수 있었습니다. 319년에는 최종 목표였던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모용외의 선비족과 일전을 준비하게 되는데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 등 다른 선비족들과 규합해 모용외를 처단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모용외의 계략에 걸린 연합군이 와해되면서 고구려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낸 모용외는 결국 전연을 세웠으며 국력이 더욱 강성해진 전연은 고구려외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로 으르렁 거렸습니다.

 

 331년 미천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 사유가 다음 왕 위에 등극하게 되니 이가 바로 고구려 16대 국왕 고국원왕이 됩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아버지 미천왕이 이룩해 놓았던 강력한 왕권을 위축시켰고 확장 시킨 영토마저 연나라에게 패배하며 크게 기세가 꺾이는 등 암군으로서 기록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의 아들들과 손자는 역사상 두번 다시 없을 동북아시아 절대강자이자 최강대국 고구려를 만들게 됩니다.

 

 한편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의 서진은 291년부터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 연달아 일어나며 매우 시끄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틈을 타 미천왕은 옛 고조선 영토였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냈고 요동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모용선비 또한 급격하게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불려 나갔습니다. 이후 중원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하북지방까지 점령할 만큼 세력이 강대해 졌으며 모용외는 전연을 건국하게 되는데 이 시기부터 오호 십육국 시대라 불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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